[코카-콜라를 만든 사람들 제2편] 코카-콜라 회사를 만든 ‘아사 캔들러

2018. 11. 7

존 펨버턴(John Pemberton) 박사가 세상에 없던 음료를 만들었다면, 아사 캔들러(Asa Candler)는 코카-콜라가 전 세계인이 즐기는 음료가 될 수 있도록 초석을 다진 사람이다. 

캔들러는 애틀랜타의 사업가였다. 비즈니스 감각과 통찰력이 뛰어났던 그는 코카-콜라의 잠재력을 일찌감치 깨닫고 펨버턴 박사로부터 코카-콜라 레시피와 사업 지분을 사들였다.

하지만 그가 매입한 지분은 일부에 불과했다. 펨버턴 박사가 죽기 전까지 캔들러 외에 다양한 사람들에게 지분을 넘겼기 때문이다.

캔들러는 독점 사업권을 가지기 위해 흩어져있던 지분을 다시 사들이기 시작했고, 1891년까지 수천 달러를 투자해 코카-콜라의 완전한 소유권을 가지게 된다.

코카-콜라 컴퍼니(The Coca‑Cola Company)의 설립

(코카-콜라의 독점 사업권을 확보한 캔들러는 좀 더 넓은 공간으로 사무실을 이전했다. (1891-1893))
 

캔들러는 애틀랜타 저널(The Atlanta Journal)에 전면 광고를 게재하는 등 코카-콜라를 성장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의 열정은 실로 대단했으며, 펨버턴 박사가 죽은 후부터 1892년까지 코카-콜라 시럽의 판매량을 기존보다 무려 10배가량 신장시켰다.

성공의 가능성을 몸소 확인한 캔들러는 본격적인 사업 확장을 위해 자신의 형인 존 캔들러(John S. Candler)와 펨버턴 박사의 파트너였던 프랭크 로빈슨(Frank Robinson), 그리고 다른 두 명의 동료와 함께 ‘코카-콜라 컴퍼니(The Coca‑Cola Company)’라는 법인을 설립했다.

그 시절 브랜드 관리의 중요성까지 알고 있었던 그는 1893년, 특허청에 코카-콜라의 상표권도 등록했다.

마케팅의 귀재,
코카-콜라를 미국 전역에 판매하다

(코카-콜라 무료 쿠폰 (1894))
 

캔들러는 코카-콜라의 맛을 자부했지만, 여전히 코카-콜라의 판매는 미국 남동부 지역에 한정되어 있었다. 그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코카-콜라를 알게 되길 원했다.

그때 떠오른 아이디어가 바로 ‘무료 쿠폰’ 마케팅이었다.

‘코카-콜라를 한 번도 마셔보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마신 사람은 없잖아? 무료 쿠폰을 나눠줘서, 일단 맛보게 하자!’

쿠폰 마케팅을 제일 처음 시작한 것은 펨버턴 박사였지만, 캔들러는 그보다 좀 더 공격적으로 마케팅을 펼쳤다.

펨버턴 박사가 애틀랜타 거리에서 샘플링 쿠폰을 나눠줬다면, 캔들러는 세일즈맨을 고용해 수천 개의 무료 쿠폰을 뿌렸고 잡지에도 쿠폰을 게재했다. (1894년부터 1913년까지 20년 동안 코카-콜라로 교환된 쿠폰만 약 850만 개에 달한다.)

이 외에도 코카-콜라 로고가 새겨진 달력, 시계, 주전자 등 다양한 기념품들을 만들어내며 코카-콜라를 홍보했다.

덕분에 사업은 나날이 성장했다. 애틀랜타가 아닌 지역에서도 코카-콜라가 판매되기 시작했고, 달라스(Dallas), 시카고(Chicago),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에도 차례로 시럽 제조 공장이 생겼다.

(한다면 하는 남자, 아사 캔들러(Asa Candler))
 

1895년, 캔들러는 마침내 자신이 목표한 바를 이루었다. “현재 미국의 모든 지역에서 코카-콜라가 소비되고 있다.”라고 공식적으로 발표한 것이다.

회사를 설립한지 3년 만에 이룬 성과였다.

100년 넘게 이어져오는
‘보틀링(Bottling) 시스템’의 시작

(코카-콜라의 첫 번째 본사 건물 (1898-1909))
 

캔들러가 탄산수 제조기인 ‘소다파운틴(Soda fountain)’을 통한 코카-콜라 판매에 집중하는 동안, 다른 한쪽에서는 코카-콜라를 전 세계로 뻗어나가게 할 또 다른 개념이 개발되고 있었다.

1894년 미시시피(Mississippi) 주 빅스버그(Vicksburg)에 살고 있던 조셉 비덴한(Joseph A. Biedenharn)은 자신의 가게에서 코카-콜라를 찾는 사람들이 날이 갈수록 많아지자, 아예 콜라를 병에 담아서 팔기 시작했다.

소다파운틴은 사람들이 직접 와서 마셔야 했지만, 병에 담아 팔면 언제 어디서든 코카-콜라를 가지고 다니며 즐길 수 있기 때문이었다.

캔들러는 여기서 또 한 번의 사업 확장 기회를 엿보았다. 코카-콜라를 병에 담아 파는 것도 미국 전역으로 확대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1899년, 채터누가(Chattanooga)에 있는 두 명의 변호사, 조셉 B. 화이트헤드(Joseph B. Whitehead)와 벤자민 F. 토마스(Benjamin F. Thomas)에게 코카-콜라를 병에 담아 팔 수 있는 보틀링(병입) 권리를 단돈 1달러에 넘겼다.

(채터누가의 두 명의 변호사, 화이트헤드(Whitehead)와 토마스(Thomas))
 

그들은 또 다른 변호사 존 T. 럽턴(John T. Lupton)과 함께 채터누가에 첫 번째 보틀링 공장을 열었고, 이듬해 1900년에는 애틀랜타에 공장을 세웠다.

하지만 보틀링 공장을 전국적으로 운영하기엔 자본이 충분하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현재의 코카-콜라 보틀링 시스템이었다.

각 지역의 기업가와 개별 계약을 맺고, 그들이 해당 지역에서 코카-콜라를 병에 담아 팔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쉽게 말해, 원액을 주면 그들이 직접 병에 담아 판매하는 프랜차이즈 방식이었다.

고속 병입 기계가 개발되고 운송 시스템이 점점 더 효율화되자, 코카-콜라는 하루가 다르게 커나갔다.

캔들러 또한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사업이 커지자 내심 놀라워했다. 그로부터 20년 동안 보틀링 공장이 2개에서 무려 1,000개 이상으로 늘어났으니 말이다.

따라올 테면 따라와봐!
독창적인 ‘코카-콜라 병’의 탄생

(코카-콜라의 독창적인 디자인 병, 컨투어 보틀(Contour bottle))
 

코카-콜라의 인기가 날로 높아지면서 캔들러는 한 가지 고민에 빠졌다. 바로 우후죽순처럼 생기는 모방제품 때문이었다. 당시 병은 단순한 직선 형태라 모방도 어렵지 않았다.

이를 막기 위해 정품을 구매하라는 광고도 내고, 코카-콜라 병에 로고까지 새겼지만 소용없었다. 코카-놀라(Koka-Nola), 마 코카-코(Ma Coca-Co), 토카-콜라(Toka-Cola), 스펠링만 살짝 바꾼 코크(Koke)까지… 유사제품은 계속해서 등장했다.

‘누구도 쉽게 따라 할 수 없는 차별화된 병을 만들자!’

캔들러는 1915년, 500달러의 포상금을 걸고 디자인을 공모하기로 했다.

조건은 단 두 가지.

어두컴컴한 곳에서 만져도, 깨진 병 조각들만 보고도 코카-콜라 병인지 알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양한 아이디어가 접수됐고, 최종적으로 미국 인디애나 주에 위치한 루트 유리공장(The Root Glass Company)의 디자이너였던 알렉산더 사무엘슨(Alexander Samuelson)과 얼 딘(Earl Dean) 등 5명의 직원들이 제안한 디자인이 채택됐다.

1915년 11월 16일 코카-콜라 병은 디자인 특허를 받았고, 이듬해 1916년에는 코카-콜라의 공식 디자인 병으로 지정됐다.

(코코아 열매의 모양과 미국 조지아주 푸른 숲의 컬러를 모티브로 코카-콜라만의 병이 탄생했다. (1915년))
 

20여 년간 회사를 드라마틱 하게 성장시킨 아사 캔들러는 1919년 2,500만 달러에 회사를 매각했다. 현재로는 3억 4천2백만 달러의 가치였다. 세 번째 CEO, 로버트 우드러프(Robert W. Woodruff) 시대의 시작이었다.

(다음 편을 기대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