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인이 사랑하는 ‘노먼 록웰‘, 코카-콜라를 그리다

2020. 07. 03

세계인에게 사랑받는 일러스트레이터 ‘노먼 록웰(Norman Rockwell)’을 들어 본 적 있는가?

왜 이토록 낯선 걸까. 세계적 인기에 비해 아직 한국에선 많이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 하지만 그림을 본다면,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느낌을 받을 것이다. 아마 코카-콜라에서 본 기억일지도.

(시골 소년과 강아지, 코카-콜라 Farm Boy and Dog Coca‑Cola (1931))

코카-콜라를 통해
6개의 작품을 남긴 ‘노먼 록웰’

노먼 록웰은 뉴욕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일찌감치 예술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뉴욕 아트 스쿨, 국립 디자인 아카데미 등에서 교육을 받았다.

1928 년에서 1935 년 사이, 록웰은 코카콜라 달력, 쟁반, 포스터, 새터데이 이브닝 지면 광고 등 6 가지의 코카-콜라 작품을 남겼다.

가장 잘 알려진 그림은 1935년 작 “Out Fishin”이다. 톰 소여를 닮은 어린 소년이 개와 함께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낚싯대를 끼고, 코카-콜라를 마시는 모습을 그렸다.

(낚시 Out Fishin (1935))

노먼 록웰이 그린
코카-콜라의 그림들이 실종된 이유?

그러나 아쉽게도 노먼 록웰의 모든 작품이 코카-콜라 컴퍼니에 남아있는 것은 아니다. 노먼 록웰은 191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약 50년간, 미국의 저명한 잡지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 1면 삽화를 그렸지만

이 시기에는 광고성 그림과 책의 삽화를 담당하는 소위 "일러스트레이터"는 예술가로 간주되지 않았다. 돈을 내고 구입할만한 작품이라는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대부분은 불행히도 쓰레기가 되어 소각되었다.

현재 코카-콜라 컴퍼니가 보유하고 있는 록웰의 작품 3점은, 25 년 동안 전 세계를 찾아 헤맨 후에야 구할 수 있었다. 코카-콜라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언제든 실종된 작품을 발견하면 제보 환영!

("실종된 록웰 작품 1” (1928년 잡지 광고에 사용))

 

("실종된 록웰 작품 2” (1930년 옥외 광고에 사용))

 

("실종된 록웰 작품 3” (1932년 작))

 

오늘날 달라진
‘노먼 록웰’ 작품의 가치

당시엔 저평가를 받았지만, 록웰의 작품을 보고 자란 세대가 문화의 중심이 되자 상황은 반전되었다. 이제는 없어서 못 구할 정도. 얼마 남지 않은 작품도 노먼 록웰의 진성 덕후들이 자신만의 컬렉션을 만들어 수집하고 있다.

잘 알려진 노먼 록웰의 팬으로는 세계적인 거장 ‘스티븐 스필버그’와 ‘조지 루카스’ 감독이 있다. 이들은 노먼 록웰의 그림으로 집을 전시장으로 만든 것은 물론, 구입할 때 서로 의논해서 순서를 정할 정도라고. 어린 시절 보고 자란 록웰의 그림들이 이들에겐 영감의 원천인 것이다.

두 거장은 경제적 자유가 오는 순간, 가장 먼저 하고 싶었던 일이 록웰의 작품을 구입하는 것이었다고 하니, 그 사랑의 깊이를 어림잡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코카-콜라의 다양한 광고와 물품에 활용된 노먼 록웰의 그림들)

사회의 부조리를
외면하지 않았던 노먼 록웰

노먼 록웰의 그림이 더 빛나는 이유는, 그의 붓끝에 담긴 문제 제기에 있다. 1943년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국회 연설을 듣고, 사회적 문제에 눈을 뜬 록웰은 ‘네 개의 자유’에 대한 그림을 그려 이슈를 만든다.

이후 록웰은 ‘*브라운 판결’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에 영감을 받아 또 다른 그림을 남겼는데, 바로 오바마 정부 시절 미국 백악관에도 전시되었던 ‘우리 모두가 함께 안고 살아가는 문제(Problem we all live with(1964))’다.

(우리 모두가 함께 안고 살아가는 문제 Problem we all live with (1964)와 오바마 전 대통령. 출처: 미국 오바마 정부 백악관 아카이브 https://obamawhitehouse.archives.gov/)


흑인 소녀 루비 브릿지스가 백인들만 다니던 초등학교에 보안관들의 호위를 받으며 등교하는 역사적 장면을 그린 그림으로, 오늘날까지 우리 모두가 함께 안고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여전히 거기에 있다.

 

* 브라운 판결

1950~60년대의 미국은 인종차별이 만연한 사회였다. 린다 브라운이라는 흑인 소녀는 집에서 가까운 백인 초등학교에 입학 불가 판정을 받게 된다. 1마일 거리의 초등학교를 걸어서 다녀야 하자, 아버지 올리버 브라운이 유색인종 권리 향상위원회에 도움을 요청했고, 캔자스주 교육위원회를 상대로 3년에 걸친 재판 끝에 승리를 얻어낸 역사적인 사건이다.

이 판결은 흑인 인권 운동의 시발점이 되어 1964년 흑인에게 실질적 참정권을 부여한 민권법이 제정되는 계기가 된다.